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 왕국 (문단 편집) ===== 페드로 3세와 카를루 1세 사후의 시칠리아 만종 전쟁 =====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하고 장남 [[알폰소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쿠스탄차는 시칠리아 왕위에서 물러나 아라곤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아라곤으로 가기 전에 먼저 로마로 가서 새 교황 호노리오 4세를 만나 양자의 화해를 요청했다. 호노리오 4세는 그녀의 제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화평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쿠스탄차가 떠난 뒤 호노리오 4세는 입을 싹 닦고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1287년 봄, 교황과 앙주, 프랑스 귀족들이 소집한 원정군이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3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 제독이 이끄는 시칠리아 함대가 원정군을 섬멸했고, 많은 프랑스와 프롱방스 귀족들이 체포된 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287년 7월,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나폴리)|카를로 2세]]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를 통해 울로론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라곤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해 10월, 카를로 2세는 막대한 몸값, 인질을 제공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1289년,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카를로 2세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전쟁을 이어가라고 독촉했다. 이후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1291년 6월 18일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위를 동생인 페데리코에게 물려주라는 형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다. 페데리코는 그저 총독 자격으로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해야 했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전쟁이 재개되었다.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시칠리아)|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나폴리)|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300년 6월 1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폰자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재차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302년, 샤를 드 발루아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내려와서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역병이 도는 바람에 군대가 궤멸되다시피하자 시칠리아군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왕이 사로잡혀 있던 시칠리아군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8월 19일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카를로 2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면 시칠리아 왕위는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다. 1303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비준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만종 전쟁은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